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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Entertainer

박광수와 박신양, 그리고 <눈부신 날에>

by :선율 2010. 3. 19.

 컨테이너안의 남자들
박광수 감독만큼 존경 받는 감독도 드물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만큼 불운한 감독도 없다. 그의 영화 시계는 1999년 <이재수의 난>과 함께 멈췄다. 박광수 감독은 <방아쇠>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눈부신 날에>도 만들고 싶었다. 처음엔 <컨테이너의 남자>로 알려진 작품이었다. 하지만 촬영은 5개월 동안이나 중단됐었다. 박광수 감독과 주연배우 박신양에겐 무슨 일이 있었다. 세상의 속도는 1990년대 한국영화를 짊어졌던 그에겐 너무 빨랐던 것일까? 영화인들은 박광수 감독이 반드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끊어진 한국영화의 맥을 이어주길 바란다. 그건 결국 컨테이너 안의 박광수 감독과 박신양의 몫이다.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다. 2003년 늦가을 <방아쇠> 제작을 준비하던 영화사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는 박광수 감독에게 말했다. “투자자들이 당신을 불신한다. 시나리오를 조금 더 친절하게 고쳐야겠다.” 사실상 제작 중단을 선언한 것이었다. 여름 무렵 정우성 씨가 <방아쇠>에 관심을 보일 때만 해도 걱정이 없었다. <비트>와 <무사>를 만든 김성수 감독이 정우성 씨와 박광수 감독의 중매를 섰다. 김성수 감독은 박광수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다. <비트>와 <무사>에서 정우성 씨, 그의 매니저 정훈탁 싸이더스HQ대표와 함께 일했다. 김성수 감독은 정우성 씨와 정훈탁 대표를 설득했다. “박광수 감독님에겐 배울 게 많다. 나도 감독님에게 배웠다. (정)우성이가 어차피 연출에 뜻이 있다면 감독님과 일해보는 게 큰 도움이 될 거다.” 마침 정우성 씨는 GOD 뮤직비디오 연출을 하면서 감독 데뷔를 꿈꾸고 있었다. 사실 유지태 씨도 정우성 씨와 같은 이유로 <방아쇠>에 관심을 보였었다. 그땐 투자자들도 <방아쇠>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나 정우성은 끝내 <방아쇠> 대신 곽경택 감독의 <똥개>를 선택했다. 유인택 대표는 말한다. “구두 계약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한달 만에 아무 말 없이 계약을 깼다.” 정훈탁 대표는 “그건 사실과 다르다. 이미 <똥개>와 출연 계약이 맺어진 상태였다. <똥개>가 끝난 뒤 함께 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어쨌든 정우성 씨의 캐스팅은 불발로 끝났다. 강원도에선 이미 세트를 짓고 있었다. 벌써 7억 원이나 들어갔다. 이제 <방아쇠>엔 화약이 없었다. 그러나 투자자는 나서지 않았다. 주진모 씨와 지진희 씨가 캐스팅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박광수 감독이 문제였다. 유인택 대표는 박광수 감독에게 말했다.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당신이다. 투자자들이 박광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젖는다. 아직도 <이재수의 난>을 이야기한다.” 박광수 감독은 말했다. “그래서, 어쩌면 좋겠는가?” 답은 없었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방아쇠>는 공포물이다. 여름이 주된 배경이다. 겨울엔 찍지 못한다. 그러나 겨울이 다 가도 <방아쇠>는 움직이지 않았다.
 
방아쇠가 부활하다
 
2년 뒤, 정훈탁 대표는 아버지와 딸에 관한 슬픈 영화 한 편을 찍고 싶었다. 월드컵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빨려 든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정훈탁 대표는 박광수 감독을 떠올렸다. “박광수 감독이라면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세상 한 가운데 서 있는 개인의 문제를 그렇게 진지하고 깊이 있게 다루는 감독이 또 어디 있나?” 정훈탁 대표는 김성수 감독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김성수 감독은 말한다. “그때 (정)훈탁이에게 왜 생각만 하고 있냐고 말해줬다. 어서 두 사람이 만나서 마음을 맞춰보는 게 어떠냐고 얘기했다. 그리곤 박광수 감독님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정훈탁 대표와 박광수 감독은 서로 잘 통한다고 느꼈다. 박광수 감독은 정훈탁 대표가 가볍지 않은 소재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하자 의외라고 생각했다. 박광수 감독은 정훈탁 대표가 ‘도시적이고 매끈하고 뺀질뺀질한 비즈니스맨’일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훈탁 대표는 고민과 슬픔이 있는 사람이었다. 박광수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그때 제목이 <컨테이너의 남자>였다. 박신양 씨가 주연으로 합류했다. 정훈탁 대표의 공이 컸다. 정훈탁 대표는 “박신양 씨에게 시나리오를 추천했다. 컨테이너에 사는 거친 야바위꾼이라는 영화 속 캐릭터에 잘 어울릴 듯 싶었다”고 말한다. 
김성수 감독은 말한다. “정훈탁 대표가 박광수 감독을 맨 먼저 떠올렸던 건 <방아쇠> 때 미안했던 부분도 있었을 거다. 어쨌든 정우성 씨가 다른 작품을 선택한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정우성 씨를 소개한 입장에서 그때 당시 나도 난처했다.” 그러나 정훈탁 대표는 “박광수 감독과 함께 일하고 싶었던 건 그의 연출력을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어쨌든 정훈탁 대표가 박광수 감독을 선택하면서 그에 대한 영화계의 평가는 달라졌다. 정훈탁 대표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처럼 스타와 영화를 결합시킨 기획을 주로 선보여왔다. 하지만 그것이 정훈탁 대표의 한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박광수 감독이 느꼈던 것처럼 ‘뺀질뺀질한 비즈니스맨’이라는 정훈탁 대표의 고정된 이미지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김성수 감독은 말한다. “(정)훈탁이가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 앞으로 영화계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다. 박광수 감독님은 1990년대 한국영화계를 대표했던 감독이다. 그를 존경하는 후배 감독들도 많다. 그러나 어느 제작자도 박광수 감독님의 작품을 제작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정훈탁 대표가 총대를 맨 거다. 그 부분은 분명 평가해줘야 한다.” 정훈탁 대표의 영화사 아이필름은 <눈부신 날에>의 제작비 대부분을 직접 투자했다.
 
불운이 재현되다
 
<눈부신 날에>는 2005년 8월 17일 부산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2002년 한국과 포루투갈 전이 열리던 날을 재현하기 위해 1천 명의 군중이 동원됐다. 200명은 엑스트라였다. 나머지는 마침 그날 열리는 2006년 월드컵 예선전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박신양은 포루투갈 전에서 박지성이 골을 넣자 무대로 뛰어올라가 응원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박신양은 투우사 옷을 입고 있다. 그는 소싸움 노름을 하는 야바위꾼이다. 그러나 그는 소싸움만으로는 요즘 장사가 안 된다고 말한다. 스페인의 투우를 도입해야 한다고 우긴다. 그는 컨테이너에 사는 주제에 유기농 야채만 먹는 웰빙 인간이다. 시대에 뒤쳐진 인간이지만 자기 멋대로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건 박광수 감독과도 닮아있다. 박광수 감독은 그동안 스타크래프트를 배웠고 즐기게 됐다. 세상의 속도는 딱 스타크래프트만큼 빨랐다. 박광수 감독은 1999년 <이재수의 난> 이후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이재수의 난>은 재난이었다. 투자자들은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제작을 맡았던 유인택 대표의 기획시대는 문을 닫을 뻔했다. <이재수의 난>은 <스타워즈 에피소드1 : 보이지 않는 위협>과 같은 날 개봉했다. 1999년 6월 26일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무모한 도전이었다. 세상의 흐름에 무지한 행위였다. 신비한 우주 전쟁 이야기와 제주도 농민 봉기 이야기 중에서 관객들이 어떤 영화를 선택할지는 뻔했다. <이재수의 난> 제작진만 몰랐을 뿐이었다. 이미 세상은 변해있었다. 그때까지 박광수 감독은 장선우 감독과 함께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영화를 가르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1990년대 한국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이재수의 난>은 극적인 몰락이었다. 그 뒤로 박광수 감독은 감독 의자에 앉지 못했다. <방아쇠>는 촬영 직전 중단됐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를 찍기 시작했던 것이다. 1천 명이 넘는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광수 감독은 슛 싸인을 했다. 박신양은 무대에 올라가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함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가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눈부신 날이었다. 
그러나 <눈부신 날에>는 2개월 만에 촬영이 중단됐다. 2005년 10월의 일이었다. 박신양 씨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허리를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주연 배우가 사고로 부상을 당했으니 촬영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11월이 됐다. 겨울이었다. <눈부신 날에>는 월드컵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여름이 주된 배경이다. 겨울엔 찍지 못한다. <방아쇠>가 그랬던 것처럼 <눈부신 날에>도 멈췄다.
 
박신양, 박광수를 오해하다 
 
박신양이 사고를 당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흔히 연상되는 촬영 현장에서의 ‘사고’와는 좀 달랐다. 정훈탁 대표는 말한다. “원래 (박)신양이가 허리가 안 좋았다. 그런데 촬영 현장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허리 디스크는 스트레스 때문에 악화된다더라. 스트레스 때문에 허리가 갑자기 주저앉아버린 거다. 주연 배우의 몸에 갑작스러운 문제가 생겼다. 사고라면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박신양 씨가 그렇게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건 박광수 감독 탓이었다. 박신양 씨와 작업한 적이 있는 익명을 요구한 한 스태프는 말한다. “박신양 씨가 사석에서 박광수 감독의 연출이 걱정스럽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연출 템포가 너무 느리다고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서 통하겠느냐고도 말했다.” 박신양 씨는 매우 열정적인 배우다. <파리의 연인>을 촬영할 때는 밤을 새워가며 토론을 벌이기 일수였다. <파리의 연인>에 참여했던 익명을 요구한 스태프는 말한다. “그의 열정은 어떤 때는 과하다는 느낌도 있지만 결국 작품에 보탬이 된다. <파리의 연인>에서 한기주의 캐릭터는 사실 작가들이 아니라 박신양 씨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자기 돈으로 개인 작가를 고용해서 자기 대사를 다듬었다. 다른 배우들은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는다. 박신양은 욕심이 많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작품을 끌고 가기 위해서 라면 배우 이상의 역할까지 하려고 드는 사람이다. 사실 <파리의 연인>이 끝난 뒤 작가들과 박신양 씨가 티격태격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박신양 씨가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영역을 넘어섰고 그걸 평소에 작가들이 곱게 보지 않았던 탓이 컸다.” 
<눈부신 날에>에서도 박신양 씨는 그랬다. 그는 열정에 넘쳤고 어떤 스태프는 그를 ‘박감독’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현장에서 다른 배우의 연기나 스태프들의 작업도 거들려고 했다. <파리의 연인>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더 나은 작품을 만들려면 자기 영역에서 잠자코만 있어선 안 된다. 좀 더 열정적으로 작품에 매달려야 한다. <방아쇠>와 <눈부신 날에>에서 제작부 일을 했던 이상현 실장은 “박신양 씨는 현장 진행이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현장에서 준비가 늦어지면 배우는 연기 호흡을 놓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호흡을 놓치게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박광수 감독은 리허설을 많이 요구했다. 배우가 자신이 원하는 연기를 해주길 바라면 감독은 리허설을 많이 한다. 그러나 박신양 씨는 리허설을 불편해 했다. 너무 잦은 리허설은 김을 뺀다. 이상현 실장은 말한다. “호흡이 자꾸 멈춰지니까 연기도 자꾸 바뀌었다. 그런데 감독 입장에선 자꾸 연기가 달라지니까 이상한 거다. 그러면 배우는 또 모호하게 얘기해주면서 그건 아니라고 하니까 힘들어 한다. 그것의 반복이었다.” 또 박신양 씨는 토론을 좋아한다. 자신에겐 분명한 의견이 있다. 그러나 고집은 아니다. 대신 격론을 벌이면서 의견을 열정적으로 교환하길 원한다.
 
박광수, 박신양을 오해하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은 박신양 씨와는 달랐다. 박광수 감독은 상대에게 의견을 말하기 보다는 타인의 말을 경청한다. 남진호 파트너스 엔터테인먼트의 이사는 <방아쇠>의 프로듀서를 맡았었다. 그는 <이재수의 난>에서도 제작부로 일했었다. “박광수 감독님은 토론 보단 상대의 말을 듣고 다시 상대에게 질문을 하는 걸 좋아한다. 상대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기다린다. 논리적이지만 천천히 대화를 한다. 상대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다. 깨닫게 하고 가르친다. 그래서 박광수 감독의 조감독 출신 중에서 좋은 감독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네 생각과 내 생각이 있고 그걸 합해서 한 생각을 만드는 건 박광수 감독님의 방식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의 생각이고 질문을 통해 생각을 더해나가는 것이다.” 이상호 제작실장도 비슷한 얘기를 들려준다. “박신양 씨는 어쩌면 자신에게 박 감독님이 구체적인 연기 지시를 하지 않는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박광수 감독님은 자꾸 질문만 던졌으니까 말이다.” 김성수 감독은 말한다. “박광수 감독님은 배우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배우의 연기에 개연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신양 씨는 현장에서 능동적이었다. 이건 요즘 배우와 예전 감독의 차이이기도 했다. 배우는 연기만 한다. 감독은 연출을 하고 촬영장을 장악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배우의 영향력은 이미 감독의 영역을 침범한 지 오래다. 캐스팅이 안 되면 돈도 안 들어오고 감독은 백수가 된다. 박광수 감독도 이미 <방아쇠> 때 겪었던 일이다. 이젠 다른 세상이다. 배우가 선의를 가지고 작품에 관여하는 건 이제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그러나 경계는 모호하다. 위태위태하기까지 하다. 박광수와 박신양도 그랬다. 박광수 감독과 박신양 씨의 차이는 결국 두 달 만에 힘겨루기로 나타났다. 김성수 감독은 말한다. “박광수 감독님이 박신양 씨에게 그랬던 모양이다. 일단 자기 일에 먼저 매진해줬으면 좋겠다고. 곡해하면 속상할 수도 있는 얘기였다.” 정훈탁 대표도 말한다. “서로 오해가 있었다. 신경이 쓰였고 결국 혈압이 올랐다. 허리가 주저 앉았다.” 
박신양 씨는 갑작스럽게 촬영장을 떠났다. 밤새 몇 군데 병원을 수소문한 끝에 ‘우리들병원’에 입원했다. 척추에 못을 박아야 했다. 며칠 뒤 수술을 받았다. 제작진에겐 알리지 않은 채였다. 수술 뒤엔 3개월 넘게 장기 요양이 필요했다. 걸을 수가 없었다. 박광수 감독이나 제작진으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겨울이 왔다. 5개월 동안 <눈부신 날에>는 촬영이 중단됐다. 그동안 영화계에선 갖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박광수 감독과 박신양 씨가 멱살잡이를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눈부신 날에> 촬영이 중단됐다는 말도 있었다. 스태프들과는 재계약을 해야 할 판이었다. <눈부신 날에>의 제작비는 30억 원이다. ‘사고’ 이후 제작비는 40억 원이 됐다. 개봉 일정도 미뤄졌다. <눈부신 날에>는 2006년 3월에 개봉할 영화였다. 6월엔 월드컵이 열린다. 그 전에 개봉하면 홍보 효과가 클 것이다. 그러나 2006년 6월을 넘기면 어색해진다. 2006년 월드컵도 끝난 시점에서 2002년 월드컵을 얘기하는 건 김 새는 일이다. 그나마도 영화 촬영이 다시 시작해야 생각해볼 일이었다.
 
오해와 불신이 시작되다
 
박광수 감독은 1999년 모 일간지와 인터뷰를 했다. <이재수의 난>이 개봉한 직후였다. <이재수의 난>은 35억 원을 들인 작품이었다. 당시로서는 ‘한국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를 들인 영화였다. <쉬리>가 전국 500만 명을 넘긴 직후였다. 그러나 <이재수의 난>은 기대를 져버렸다. 그 때 박광수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흥행은 신경 쓰지 않는다. 상당히 재미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칠수와 만수>가 흥행에 실패하는 걸 보고 아예 그 길을 포기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내 영화는 상업영화, 대중영화가 아니다. 작가주의란 시장이나 흥행의 논리에 관계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드는 거다. 외국에도 난해한 작가주의 영화는 많다. 그래도 보는 사람은 본다.” 기자는 이렇게 질문 했다. “그래도 32억 원은 1년 한국영화 제작비의 10%에 가깝지 않은가?” 박광수 감독은 대답했다. “외국에서는 더 어려운 영화에 더 많은 돈을 쓰는 경우도 많다. 제대로 만들려면 50억 원은 있어야 했다.” 
유인택 대표는 당시 박광수 감독의 이 인터뷰를 읽고 투자자들이 격분했다고 기억한다. “박광수 감독이 나중에 전화를 해왔다. 인터뷰가 편집이 돼서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하더라. 하지만 감독이 흥행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것 자체가 투자자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게다가 영화가 한 푼도 건지지 못할 처지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유인택 대표는 2000년대 이후 박광수 감독에 대한 선입견은 그렇게 시작됐다고 얘기한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투자자는 말한다. “그때 박광수 감독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다시는 함께 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건 오해였다. 유인택 대표조차 박광수 감독이 흥행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곡해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인택 대표는 아직도 <이재수의 난> 때 진 빚을 갚고 있다. 그런데도 다시 박광수 감독과 <방아쇠>를 만들려고 애썼다. 유인택 대표는 말한다. “박광수 감독은 매우 합리적이며 효율적으로 영화를 찍는다. 그런데 박광수 감독이 예산을 방만하게 유용한다는 얘기가 한국영화계에 퍼진 뒤엔 그것이 고정 관념처럼 자리잡았다.” 남진호 이사도 말한다.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찍는 분이다. <이재수의 난>도 흥행에 실패해서 그렇지 예산은 단 한 푼도 낭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생긴 선입견은 결국 <방아쇠>를 잡아먹었다. 당시 <방아쇠>를 투자를 심사했던 한 메이저 투자사의 임원은 말한다. “<방아쇠>의 시나리오는 정말 멋졌다. 어렴풋하게 깔려있는 동성애 코드를 생각해보면 <왕의 남자>가 연상될 정도다. 하지만 연출자가 박광수라는 게 문제였다. 기안을 올려도 윗선에서 고개를 저었다. 컨트롤이 안 되는 감독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당시 투자 심사를 맡았던 투자 임원들 중에서 박광수 감독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영화계의 투자 환경을 한 차례 바뀐 뒤였다. 1990년대까지 득세했던 금융 자본이 물러가고 대기업 자본이 들어와있었다. 그들은 박광수 감독을 몰랐다. 그에 대한 선입견과 소문만 알았다. 그리고 1999년 흥행 실패와 평단의 비난으로 상처 받은 박광수 감독이 남긴 편집된 인터뷰만 남았다. 박광수 감독은 그렇게 주류 영화계에서 밀려났다.
 
어른 감독은 외롭다
 
<눈부신 날에>의 촬영이 중단됐다는 소식은 박광수 감독과 박신양에게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박광수 감독에게 <눈부신 날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현재 영화계의 주류인 정훈탁 대표와 박신양 씨가 박광수 감독에겐 기회였던 셈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정지했다. 박광수 감독에 대한 선입견이 또 하나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투자자들의 불신은 겨우 돌파했다. 그러나 배우들의 불신은 앞으로도 박광수 감독을 영원히 따라다닐지도 몰랐다. 박신양은 <파리의 연인> 이후 선구에 공을 들였다. <파리의 연인> 직전만 해도 박신양의 주가는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 역시 오래된 배우였다. <파리의 연인>의 제작진이 점 찍었던 배우는 애초에 박신양이 아니었다. 이제 신중해야 했다. 의미도 있으면서 완성도도 있어야 했다. <눈부신 날에>가 답이었다. 예전보다도 훨씬 더 열정적으로 일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역효과가 날 판이었다. 
요즘 배우들은 감독을 고른다. 어르신 감독과는 작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불편하다는 게 이유다. 배우들이 기피하면 투자가 안 되고 감독을 못한다. 예술적, 상업적 가능성과도 무관하다. 그저 불편하고 어려운 존재가 됐기 때문에 영화를 못 만드는 것이다. 박광수 감독은 이제 한국영화계에서 어른이다. 어른은 영화 만들기가 힘겹다. 그런데 박신양 씨와 호흡을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은 그동안 부단히 애써왔다. 최수영PD는 10월 촬영이 중단될 때까지 <눈부신 날에>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최수영PD는 말한다. “박광수 감독님은 <눈부신 날에> 촬영을 앞두고 한 영화 매체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몹시 지루해 했다. 자신은 변했는데 기자들의 질문은 매번 똑같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인터뷰 안 하겠다고 말했다. 박광수 감독은 생각이 몹시 대중적이다. 박신양 씨와의 문제도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극복됐을 거다. 감독님 스스로도 이번엔 꼭 좋은 영화를 만들어서 2006년에 살아 남겠다고 말씀하신다. 박광수 감독님은 그럴만한 영화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걸 증명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박광수는 희망이다
 
박광수 감독에 대한 영화인들의 존경심은 대단하다. <눈부신 날에>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박신양 씨보다는 박광수 감독의 역정을 든다. 익명을 요구한 한 스태프는 “박신양 씨가 그래서는 안 됐다. 아무리 현장이 힘들어도 제작진과는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수술을 해버린 행동은 잘못됐다. 박신양이란 배우는 좋은 배우다. 하지만 이번엔 잘못했다”고 말한다. 촬영장을 이탈한 박신양 씨를 어쩌지 못한 정훈탁 대표를 탓하는 영화인도 있다.
김성수 감독은 박광수 감독이 영화를 찍을 여지가 없는 한국영화계를 질타한다. “박광수 감독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대장’이다. 많은 감독들이 박광수 감독님에게 영화를 배웠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를 보면서 난 너무 놀랐다. 선배들이 멈추지 않는구나 생각하면서 감동했다. 한국영화계엔 그런 감동이 필요하다. 안 그러면 감독이 감독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언젠가는 주류에서 밀려나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면 세상과 자꾸 타협하게 된다.” 남진호 이사와 이상현 제작실장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박광수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고 못 만들고는 지금 한국영화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박광수 감독님은 현명하고 현장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도 너그럽다. 만일 다시 <방아쇠> 촬영이 재개된다면 기꺼이 스태프로 참여하고 싶다. 이제 박광수 감독님에 대한 세상의 오해가 풀릴 때도 됐다.” 그래서 <눈부신 날에>에 대한 걱정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박광수 감독에 대한 영화계의 막연한 불신은 <이재수의 난> 이후 새로운 영화가 없어서인 탓이다. 오승욱 감독은 박광수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다. <킬리만자로>에서는 박신양 씨와 함께 작업했다. 박광수 감독은 <눈부신 날에>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오승욱 감독을 만나서 박신양 씨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별 말씀 드리진 않았다. 좋은 배우라고만 말씀 드렸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분명 좋은 배우다. 그래서 박신양 씨에 대해서 들리는 이상한 말들은 전혀 믿지 않는다. 다만 박광수 감독님의 새 작품을 어서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럴 만한 자격이 되는 분이기 때문이다.” 
김성수 감독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이어주는 감독으로 이명세와 장선우, 박광수를 꼽는다. 그러나 이명세 감독은 2000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오랜 동안 미국에서 머물렀다. 장선우 감독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극단으로 휘발됐다. 박광수 감독만이 한국영화계에 남아 고독하게 달라진 영화 환경에 맞서왔다. 그래서 실패도 했다. 남진호 이사는 “2003년 <방아쇠>가 멈춰 설 때는 유달리 한국영화판이 경박했던 때였다. 그런 때가 있다. 영화인들이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는 순간 말이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이 다른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유인택 대표는 <이재수의 난> 이후 전혀 다른 제작자가 됐다. 그는 <목포는 항구다>를 만들었고, <신부수업>을 만들었다. 유인택 대표는 말한다. “2000년대는 내가 있던 1990년대와는 다른 세상이다. 그 안에서 제작자의 마인드를 바꿔야 했다. 누구는 내가 돈만 좇는 제작자가 됐다고 한다. 사실 기획시대 안에서조차 웰메이드 영화를 추구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들도 한다. 그래서 난 아예 ‘채플린 엔터테인먼트’라는 새로운 영화사를 차렸다. 코미디만 만드는 곳이다. 난 그렇게 변하고 2000년대의 변화된 영화 환경에 적응했다. 하지만 난 그래도, 박광수 감독은 달라야 한다. 제작자는 쉽게 변할 수 있어도 감독은 변할 수 없고 변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길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박광수 감독만큼 뚝심 있는 감독도 없지. 다만 주변에서 도와줘야 한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유인택 대표는 말한다. “박광수 감독은 인텔리다. 지식인이다. 그건 먹물 근성이다. 1990년대엔 먹물 근성이 통했다. 하지만 2000년대는 먹물 근성이 설 자리가 없다. 그게 박광수의 영화가 2000년대에 설 자리를 잃은 이유일 거다.”
하지만 김성수 감독은 말한다. “박광수 감독님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개봉하는 순간 잘렸던 1990년대와 2000년대가 만나게 될 거다. 1990년대의 영화는 1980년대의 영화를 부인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2000년대의 진정한 영화 문화는 이전 세대와 교류해야 풍성해질 수 있다. 지금 한국의 영화 문화는 절름발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 채 앞으로만 가고 있다. 이젠 걸어온 길을 돌아봐야 할 때다. 그건 1990년대의 감독들이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고 2000년대의 영화 환경이 너그러워져야 가능한 일이다. 난 정훈탁 대표와 박광수 감독의 만남에서 그 가능성을 봤다.”
 
눈부신 날에
 
<눈부신 날에>는 지난 3월 초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5개월 만이다. 박광수 감독과 박신양 씨는 낮에는 자고 밤에는 찍는 밤샘 촬영을 계속하고 있다. 늦은 새벽 통화가 된 박광수 감독은 “아직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에게 왜 연출을 하고 싶은 건지. 왜 영화를 만들고 싶은 건지. 무엇이 박광수 감독의 시계를 1990년대에서 멈추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박광수 감독은 이상현 제작실장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난 오랫동안 영화를 못 만들어서 썩었다.” 박광수 감독은 “영화가 완성된 다음 다 얘기하자. 어떤 질문인지 알겠다. 지금은 영화가 무엇인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다 하고 있는 작업을 마무리하는 게 더 절실하다”고 말했다. 정훈탁 대표는 “다만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물론 추가 제작비가 들어가야 하고 개봉 일정도 틀어졌지만 찍어놓은 장면들이 몹시 좋았다. 박신양 씨도 같은 생각이었다.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꿈꾸는 거다. 박광수 감독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그렇다. 우린 그걸 이루려고 한다.” <눈부신 날에>는 제작진의 절반 가량이 바뀌었다. 아직 <눈부신 날에>는 40회 차 정도를 남겨놓고 있다. 어려운 장면을 다 찍었다지만 갈 길이 멀다. <눈부신 날에>의 촬영 재개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감독들이 현장을 한번 찾아가야겠다고 난리들이다. 박광수 감독과 박신양 씨는 이제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 서로 맞춰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박광수 감독 역시 곡절 끝에 2006년에 적응하고 있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이 말하고 싶어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소외된 인간, 세상 속의 개인에게 관심이 있다. <눈부신 날에>는 그 얘기다. 다만 그는 달라진 제작 환경에 적응하고 있을 뿐이다. 
1999년 6월 14일, 박광수 감독은 한겨레 신문사에서 장선우 감독을 만났다. 장선우 감독은 박광수 감독에게 말했다. “난 박 감독을 볼 때마다 한 때 무지 갑갑했어. 세상은 변하는 데 쟤는 왜 안 변하지? 그런데 지금 보면 변해 봤자고 안 변해 봤자지. 진짜 변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고 봐.” 장선우 감독은 그 무렵 표현의 극단을 좇고 있었다. 그때 장선우 감독은 박광수 감독에게 조선시대 명필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추사는 되게 잘난 척 했다. 그런데 9년 동안 제주도에서 귀향살이를 하면서 변한다. 추사체도 거기서 나왔다. 말년에 죽을 때가 제일 인상적이다. 8살 때 썼던 서체로 돌아간다. 졸렬한 필체를 더 좋아하면서 말이다. 그런 게 의미가 있다. 그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으면 싶어했다. 영화도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 하지만 요즘은 생각이 달라. 세상은 지겹게 안 변한다. 변해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던 거지.” 그 때 박광수 감독은 대답했다. “그런 건 마음 먹기 나름이다. 이젠 내가 무슨짓을 해왔는지 스스로를 인터뷰한 뒤에 지금까지 했던 영화를 완전히 끝내고 새로운 영화를 할 생각이다.” 그 땐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이제 박광수 감독의 새로운 영화가 7년 만에 만들어지고 있다. 
PREMIERE 4월호 신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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