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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보는 한국영화의 저력-남북관계같은 정치적 민감 소재를 대하는 자세

by :선율 2024. 3. 2.

한국 영화의 부흥과 성과를 자유체제와 검열자유로 일축하는 것은 왜 부적절한가


'서울의 봄'이 방영된 이후 많은 국내(중국)팬들은 감탄하면서 "한국 영화인들은 정말 과감하다" "한국은 역사를 직시한다" "한국인은 반성할 줄 안다" 라는 식의 상투적인 토론과 논의가 이어졌다. 한국 영화와 한국 문화, 한류가 어떻게, 왜, 전세계로 돌파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항상 "한국에는 검열과 규제가 없다"라고 답한다.



중국인들은 창작에 틀에 박힌 제한이 없어야 영상문화 산업이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정확하고 적절치 못한 것은 지난 수십년 간 한류의 부상이 한국 정부에 의해 추진된 결과라는 인식의 오해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 질문도 주중한국문화원에서 어느 강의를 듣고 나서야 알아차린 적이 있다. 강의에 참석한 한국 교수님은 "한국영화의 전환과 성장에 대해 인터넷에서 중국 팬들은 '검열 개방'이라는 표현을 쓰며 그 성공 원인을 파악하고 싶어한다" 라며

"한국영화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나라(한국)의 검열 제도가 폐지되기 그런 추세는 훨씬 전부터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 이유는 당시 한국 민간 사회 각계 인사들이 활발하게 교류하고 연대하여 권력자들이 한사코 묶어둘 수 없는 막강한 "시민의 힘"을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류의 도약을 진정으로 도왔던 것은 검열/개방이 아니라 "개방"이다.



한국영화의 기세는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됐다. 앞서 이승만 · 박정희 군정 시기, 나아가 일제 식민시대까지 한국영화는 여러 나라의 영화문화산업이 경험했듯, 한국영화는 이데올로기와 위정자의 생각에 따라 움직였다. 80년대 이전, 한국의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는 모두 전통 사회 하의 풍습과 구속을 매우 중요시하며, 강렬한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띠고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영화 속 이미지는 "보수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의 미덕"의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 전통적인 아버지의 이미지가 칭송되는 작품이 널리 성행하고, 코미디 영화는 시장의 강렬한 욕구가 되는 유형이 되었다. 혼외정사, 섹스, 에로 영화 등 사회 통념에 도전하는 제재 유형은 모두 범접할 수 없는 금기로 간주된다. 6.25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해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같은 작품은 천편일률적으로 북쪽의 북한 군인들의 잔혹함과 가증스러움을 강조하고 남쪽 병사들의 존경과 정당성을 부각시켜 너나 할 것 없이 적대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한국영화가 관례에 집착한 것은 위정자의 요구에 따라 민족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홍보 기능을 부여한 것이었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이데올로기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더해서 삶과 영화 속의 인물을 흑백랜즈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한국영화의 전환과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검열은 위정자가 바뀌면서 규제가 풀리지는 않았지만 대중의 일상 생활은 물론, 영화 속 스토리텔링에서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욕구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인간과 인문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따라서 정치적 압력이 항상 존재하더라도 문화계에서는 호불호의 이분법이 절대적이지 않고, 부정과 불륜은 표현되거나 공감될 수 있으며, 사회적 변두리에 대한 연민어린 묘사와 같이, 이전과는 다른 개방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임권택 등 자국 감독들이 금기시되는 주제와 전통적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을 때, 사회가 더 이상 그들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인정해 주고자 할 때, 설령 결과가 엇갈리더라도 공론장에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토론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의 발상의 전환은 당시 한국 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권력자들도 보기 드물게 물러서기 시작했다. 매일 외출할 때마다 젊은이들에게 돌을 맞는 것을 원치 않는 전두환은 주변 사람들에게 포르노와 심야영화를 장려하고 주의를 분산시키라고 말한다. 1993년 김영삼 같은 민간 출신 대통령이 등장해 군인정치를 종식시키고, 5년 뒤 DJ가 내건 '지원하고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정치권은 비로소 민간의 보조를 따라 검열의 마지막 굴레를 벗었다.



그래서 한국 영화의 약진은 검열 폐지로만 귀결될 뿐, 본의 아니게 "어쨋든 정부가 주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발상의 전환을 겪은 민간의 힘이 제도를 바꾸게 했고, 검열이 폐지된 뒤에도 한국 영화의 수혜를 계속 보게 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주제와 내용을 더 많은 영화들이 인문학적 배려의 시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앞으로 많은 고전적 한국에서의 남북관계의 풍부한 묘사다.



강의에서 그 교수의 말을 인용하자면 남북 관계는 한반도 전체의 이데올로기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문화계가 이데올로기적 창작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남북 관계에도 민감한 이슈와 도전적 통념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 이데올로기보다 사람을 더 믿는다는 것은, 아무리 남북 간 이해가 첨예하게 충돌한다고 해도 개인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액션 쉬리는 가장 먼저 도전한 영화였다. 이 첩보영화에서 남북관계의 씁쓸함과 처절한 연인 관계로 그려진다. 김윤진이 연기한 북한 공작원은 남한 정보부에 침투해 한석규가 연기한 남한 공작원에게 정보를 빼돌리다가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첩자 신분이 정보국에 적발되면서 대한민국 특수요원인 그가 직접 나서 연인을 사살하기에 이른다.



1980년대 이전이라면 스파이가 사살되고 적의 음모가 산산조각이 난 뒤 대한민국 특공대원들이 승리의 개선가를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을 겪던 1999년, 쉬리는 애인을 사살한 뒤 특수요원이던 그가 웃지도, 갈채도 없이 홀로 떠나고, 애인인 김윤진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을 듣는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인간에 대한 공감대가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압도했기 때문에 쉬리의 마지막은 남북 분단이 초래한 개인적 비극적 경험이다. 이 영화가 개봉 후 한국 영화사 흥행 기록을 깬 것은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높은 위치에 있지 않고, 사회적 사조가 1980년대 이전의 모습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1년 뒤 박찬욱이 똑같이 흥행기록을 세운 '공동경비구역'에서 관객들은 38선 양쪽의 남북 병사들이 만나 팽팽한 대치 국면이 아니라 웃고 떠드는 절친한 친구가 되고, 결국 죽음으로 맞서 이 우정을 산산조각 내려는 참혹한 정치 현실을 보게 된다.



2003년 영화 '실미도'는 1960년대 현실적 사건을 소재로 대한민국 국군에 끌려가 무자비한 군사특훈을 받은 사형수 31명이 평양에 잠입해 청와대의 정치보복 목적의 암살을 자행한 사회 더욱 수용하기 어려운 집단을 건드렸다. 보통 사형수는 동정받지 않는 신분이지만 이 영화는 결국 청와대로 달려가 자신들의 바람을 청원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포탄이 아닌 동포의 총부리에 참혹하게 사살되는 생생한 모습으로 끝난다.



사형수들까지 비난할 수 있다면 형제끼리 왜 서로 죽이려 하겠는가.



2004년 강제규 감독의 전쟁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남북관계를 장동건과 원빈이 연기한 친형제로, 이 전쟁이 남북 이념과 달라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현실을 한 축으로 묘사했다. 이런 현실은 50여 년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한국인과 가족을 힘들게 했다. 북측의 만행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고, 어떻게 남측의 이승만 대통령이 빨갱이들을 청소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을 청소하는 보도연맹 사건을 주제로, 맨 손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매장시켰는지 돌아보게 된다.



불과 3개월여 만에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 작품 최초로 천만 관객을 넘겼다. 한국 대중과 창작자 모두가 역사를 기피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거나, 현실적 사건이 거론되지 못할 우려가 있을 때, 판타지나 공상 같은 소재가 한국에서도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2005년 영화 '웰컴 투 동막골'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설치됐지만 상상과 낭만이 가득한 가공의 세계를 담아낸 이 마을은 신하균이 연기한 한국병사, 정재영이 연기한 북한병사, 그리고 미국 병사로 구성된 이상한 연맹의 보호를 받으며 순박하고 선량한 마을 사람들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했다.

이렇게 한국 영화계의 생각이 열린 후에도 한국 영화인들의 창작 행보는 경제와 예술이라는 보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2006년 '한반도' 등 남북관계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했을 때 영화인들과 제작사들은 이런 장르의 흡인력이 떨어진 것 아니냐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최근 영화 위기를 겪으면서 한국 문화계도 어떻게 하면 산업을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이명박과 박근혜, 또는 지금의 윤석열라는 보수파 인사들이 등장해 한국 관객들도 영화를 보기 싫어지기 시작했으니, 한국 영화인과 제작사도 이런 작품을 그만두고 1980년대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나 발언은 일체 없었다.







정치적 분위기가 영구적으로 느슨하게 개방되기는 어렵다. 심지어 규제는 개선돼도 과거로 다시 역행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열린 사상은 다시 보수로 돌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한국 영화인들은 정치, 스트리밍과 OTT의 부상, 코로나19 사태 등 일련의 영향과 충격에도 불구하고,

창작 방식을 과거로 되돌리거나 '서울의 봄' 같은 작품을 만들지 말고 정치적 · 재정적 지원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국 관객들이 영화처럼 문화 창작에 여전히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검열을 폐지했지만 1980년대 이전의 보수적 이념에 변함이 없다면, 한국 영화계에서 이런 과감한 사고와 관찰이 가능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와 지금과 같은 세계적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한국 관객들이 미개했다면 이런 흐름이 지속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쉬리를 보고나서 남파 간첩들을 홍보하는 영화라며 비합리적 의혹을 제기하고,

강제규 같은 예술인들이 북한의 돈을 받았다고 고발하고, 문화계를 단속하라고 청원했을 것이다.



또, '살인의 추억'을 보고나서 "저 못된 놈이 제대로 된 정신 교육을 받지 못해 이런 영화를 찍어 오히려 치안을 악화시키고 정부를 비난한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은 한국 사회의 그늘진 이면을 팔아 서방 영화계에게 잘 보이려 한다며 비난했을 것이다.



'동막골'은 '날조'라는 꼬리표를 달고 하차해야 했을 것이다.



'변호인'을 찍은 송강호를 단속해달라며 박근혜에게 청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는 실제로 그랬다.


한국영화는 좋은 규제가 아니라 시민들의 열린 마인드에 의존해 왔다. 사회 전반에 깔린 열린 사상 말이다.


微博正文
TNABO北美票房榜吧
2-26 17:54 来自 微博网页版 已编辑
#TNABO# 为什么要说,韩国电影能取得近年来的腾飞与成就,用“审查放开”与“体制改良”来概括其实是不够准确与恰当的

《首尔之春》上线播出后的这些天,我们很多影迷在一边表示钦佩的同时,一边又开始回到那些连我们自己都觉得有些老生常谈的讨论跟主张:“韩国电影真是敢拍敢写”;“韩国人敢于正视历史”;“韩国人懂得反思”......无论讨论得如何,最后在分析和总结韩国电影以及更大层面上的韩流这些年为何能实现突破走向世界时,我们总是习惯用一句几乎人人耳熟能详的话来概括:『韩国没有审查限制。』

这句表述本意其实是想说,创作上没有条条框框的限制,让影视文化产业有了飞升的空间。而这样的理解是正确的。但是这条总结我之所以说不够准确跟恰当,是因为它其实还隐藏了一个很容易把我们带向认知误区的前提,就是把过去几十年韩流的崛起,全都看作是上层执政领导者推动的结果,而忽略了底层民间力量长期以来一直在发挥的作用。

这个问题也是一次我在驻华韩国文化院上听了一场讲座后才察觉到的。讲座上的那位来自韩国的教授,用一口普通话跟台下的国内听众们说道,她有的时候上网会看到中国的影迷们在谈起韩国电影时,用“审查开放”来概括其近来成功的原因,而这让她总忍不住想加入到对话中,做一个必要补充说明:仔细观察历史,你可以发现韩国电影的转变与起势,早在这个国家的审查制度被废除前就已经开始显现出来了;其原因在于,当时的韩国社会各界人士已经开始逐渐团结起来,形成一种执政者无法死死束缚住的强大民间力量,迫使后者不得不跟上走在自己步伐前面的大众,去破除审查这道屏障。

更准确恰当来说,真正帮助韩流实现腾飞的,不是审查放开,而是思想开放。

韩国电影的起势是在1980年代以后开始显现的。在此之前,也就是李承晚、朴正熙领导下的军政时期,甚至更早的日治殖民时代,韩国电影就像很多国家的电影文化产业都经历过的那样,一直跟着意识形态与执政者的想法去发展。在80年代转变以前,韩国的电影人们所制作的电影,都在高度讲究去遵循传统社会下的习俗与约束,带有强烈的意识形态色彩:女性银幕形象要符合“遵守女德”的期望;传统父亲形象得到歌颂的作品广泛盛行;喜剧片成为市场强烈渴求的类型;婚外情、情色片等挑战社会观念的题材类型都被视为不可触及的禁忌...而对于韩国战争(朝鲜战争)题材电影,诸如《一去不回的海兵》这样的作品无一不是在千篇一律强调北边朝鲜军人的暴行与可憎,突出南方士兵的可敬与正当性,呈现某种非你死即我亡的敌对关系。

当时的韩国电影会墨守成规,不仅是因为那个时期的电影人们要遵从执政者提出的要求,给电影赋予获得民族认同感的宣传职能;更是因为,当时整个韩国社会里的广大人民群众都相信,意识形态应该放在首位,倾向于使用一种非黑即白的方式来看待生活与电影中的人与事。

但是到了80年代,韩国电影出现的转折与改变的苗头。虽然审查并没有随着执政者的更替而放开,但是社会的思想都经历了明显的转变:无论是大众日常生活,还是电影里的故事内容,对意识形态的讲求开始下滑,对人与人文艺术的关注变得越来越多。因而即使政治高压始终存在,文化界却形成了一股不同于以往的开明氛围:好坏二分法不是绝对的,偷情与不伦恋是可以得到呈现甚至同情的,社会边缘人是会被看见的血肉。而当林权泽等一批本国导演拍摄了许多挑战禁忌话题与传统意识形态的作品,社会对它们不再是一味地否认与批评,而是愿意给予认同,可以在台面上做出讨论,哪怕是结果难分输赢的争执不休。

思想的转变,给当时的韩国电影带来了新的活力。面对社会各界人士的团结,看似不可战胜的政治强人们,也都开始做出罕见的退让。不希望每天出门都被年轻人砸石头的全斗焕,跟身边的人说要不就解禁情色片与夜场电影,分散下大家的注意力吧。等到1993年金泳三这样的文人上台终结军人政治,以及五年后金大中提出的“给予支援,不干涉”的原则时,政界才终于跟上了民间的步伐,卸下审查这道最后的束缚。

所以说,韩国电影的腾飞,要是单归结于审查制度的废除,其实无意间是把它看作是一个自上到下去推动的过程。可实际上,它在很大程度上是由下到上的推动。是思想经历了转变的民间力量,倒逼制度做出改变,并在审查被废除后继续让韩国电影从中受益:更多电影开始用更人文关怀的视角,去讲述那些曾经不敢想象与探讨的话题与内容。而最能够体现这一改变的,就是接下来很多经典韩国里对朝韩关系的丰富描绘。

引用讲座上那位教授所说的一句话,朝韩关系是整个半岛意识形态中最核心的部分。如果文化界真的要想摆脱意识形态对创作的束缚,那就意味着,创作者在讲述一个故事的过程中,不会因为触及到了敏感议题与挑战传统认知而感到畏惧,哪怕它所涉及到的是朝韩关系。要是相信人是高于意识形态的,那么即使是朝韩利益冲突再激烈,也高不过个人的重要性。

1999年姜帝圭执导的动作片《生死谍变》,是最早迎接这种挑战的作品之一。在这部谍战电影里,朝韩关系被写成了一种暧昧甜美,同时不失苦涩与凄惨的恋人关系:金允珍饰演的一名朝鲜特工打入了韩国情报部,从韩石圭饰演的韩国特工身上窃取情报,却动起了真情爱上彼此。随着她的卧底身份被韩国情报局侦破后,身为大韩民国特工的他必须亲自出手将恋人击毙,以履行保护国家安全的职责。

如果是在1980年代以前,这样的故事演到最后,其结局一定是:在卧底被击毙,敌人的阴谋被粉碎后,大韩民国的特工们迎来了胜利的狂欢。但是在思想经历了转变的1999年,《生死谍变》最后呈现的,是一个人痛失挚爱的悲剧性结局:在击毙爱人后,身为特工的他没有欢笑,没有喝彩,只是一个人独自离开,事后得知恋人向他隐瞒了一个秘密,并回想起她曾给自己留下的一条遗言。

因为对人的认同已经压倒了意识形态的重要性,《生死谍变》最后突出的是南北分裂给个人造成的悲剧性经历。这部电影在公映后打破韩国影史票房纪录,也体现了意识形态在整个韩国社会已不再是高于一切的地位,社会的思潮已经不再是1980年代以前的模样。一年后,在朴赞郁那部同样打破票房纪录的《共同警备区》里,观众可以看到三八线两侧的朝韩士兵,见面后不再是兵戎相见,形成一种紧张的对峙局面,而是成为了有说有笑的好朋友,最终以死去对抗想将这段友谊彻底粉碎的残酷政治现实。

2003年电影《实尾岛》取材于60年代现实事件,并触碰了社会更难以接受的群体:有31名死囚犯被大韩民国国军抓去接受惨无人道的军事特训,以潜进平壤完成一场青瓦台出于政治报复目的而发起的刺杀行动。通常,死囚是一种不被人所同情的身份,但是本片最后展示的是一群被国家遗弃的鲜活形象:他们在迈步冲向青瓦台替自己讨回说法的上访过程中遭到军队阻扰,最后惨死在了同胞的枪口而不是北方的炮火之下。

如果连死囚犯都有人道可言,那兄弟彼此之间又为何要自相残杀呢?2004年姜帝圭执导的战争片《太极旗飘扬》,便把朝韩关系描述成一对手足:张东健与元彬饰演的亲兄弟,因为这场战争与南北意识形态的不同而要承受着分离的痛苦现实。而这种现实让五十多年来的好几代韩国人与家庭付出了巨大的代价。它没有再一味地强调北方的暴行,而是回过头看南方李承晚总统,是如何以清扫赤色分子的名义一手策划起清洗异己的保导联盟事件,埋葬了那些手无寸铁的无辜平民百姓。

相隔不到3个月时间的《实尾岛》与《太极旗飘扬》,成为韩国第一批跨过千万观影人次大关的作品。当韩国的民众与创作者都不再觉得历史需要避讳,或有担心有现实事件是无法被拿到台面上讨论时,幻想与空想类故事题材在韩国也都有了生长的土壤。2005年电影《欢迎来到东莫村》虽然也设置在韩国战争的背景下,但是却采用了充满想象与浪漫色彩的架空世界,展示了一座世外桃源一般的小村子,得到了一个由申河均饰演的韩国兵,郑在泳 饰演的朝鲜兵,还有一个美国大兵所组成的奇怪联盟提供的庇护,让这里淳朴善良的村民们免受战火的纷扰。

当思想打开了以后,韩国电影人继续创作的步伐,就只会受到经济与艺术这些更现实直接的因素所影响。比如2006年《韩半岛》等朝韩关系电影票房口碑失利时,电影人与制作公司们开始思考,是不是这类题材吸引力减弱了,要适当减产了;再比如近来韩影危机,韩国文化界也在一直反思,怎样才能去挽救这个产业...

可是从来没有再出现过这样一种情况跟想法,就是认为因为政治气候变了,有李明博与朴槿惠,或是现在的尹锡悦这些保守派人士上台了,所以韩国观众开始也不爱看这些电影了,韩国电影人与制作公司也应该停止拍摄这类作品,回到1980年代以前的创作思路。

政治氛围很难做到永久性的宽松开放。甚至连制度规章就算可以得到改善,却也可以再被改回到过去。可是思想一旦被打开,就很难再转回到保守。所以即使遇到政治收紧,流媒崛起、疫情爆发等一系列影响跟冲击,韩国电影人始终不会说,创作方式要退回到过去,不要再拍《首尔之春》这样的作品,来获得政治上或财务上的自保。而这部电影所取得的反响,也说明眼下的韩国观众跟电影人一样,对文化创作依然保持着开放包容的态度。

换一个角度来想,如果说韩国很早已经就废除了审查,但是它的人民始终只保持着1980年代以前的保守思想观念没有一点变化,那么韩国电影界还会涌现这些敢于思考、富有观察的电影,并形成现在这股扩张到全球的潮流吗?这些作品被拿出来给大家看,你能想象它们会从这些思想未开化的观众口中获得怎样的反响吗?

《生死谍变》上映,会有观众质疑韩国间谍看不出身边有内鬼的情节不合理,呼吁政界插手整顿文艺界:“查查姜帝圭这帮搞艺术的有没收北边的钱。”

《杀人回忆》上映,观众对主角对视的结尾大加抨击,表示“奉俊昊这小子是欠教育了,要不是你们年轻人没事跑街上朝全将军丢石头,警察就不会被调去维稳导致凶手逃脱制裁了,更不会有你现在这部电影,居然还埋怨起了政府”。

朴赞郁的“复仇三部曲”会被怒斥是在贩卖韩国社会的阴暗落后,媚外讨好西方大奖。《东莫村》会被扣上“胡编乱造”的标签被要求停映下架。朴槿惠拉黑拍了《辩护人》的宋康昊,将得到民间的一片叫好,被鼓励要多封杀与教育不听话的文化界...

韩国电影这一路走来,靠的从来不是好的规章制度,而是开放的思想态度。来自整个社会的开放思想。

【电影出处】

《生死谍变》(1999)
《共同警备区》(2000)
《实尾岛》(2003)
《太极旗飘扬》(2004)
《欢迎来到东莫村》(2005)
《铁雨》(2017)
《特工》(2018)
《摩加迪沙》(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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