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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Entertainer

하퍼스 바자 2010년 4월호 고현정 인터뷰

by :선율 2019. 8. 29.
고독은 이브닝드레스다

고독은 고현정으로 하여금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게 만들었다. 예배우로서 가장 높은 곳에서. 하지만 고현정과의 인터뷰는 역설적이게도 그럴듯한 장식이 얼마나 지루한 지옥일 수 있는지 깨닫게 했다. 그리하여 질문과 답, 그 외의 어떤 장식도 필요 없다고 느낀 에디터는 겨우 한 편의 시만을 인용 할 수 있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고현정의 지성이 놀랍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건 칸트를 운운하는 지성이 아니라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 안에서 곰삭은 지성이라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그런 거였다.
어떻게 그런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오랫동안 마음 둘 곳이 없어서 혼자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고 보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예컨대 샴푸 사용법부터 다시 읽는 거죠. 혼자 앉아서.

한번은 박카스 병을 들여다보며 혼자 너무 웃었던 기억이 나요. 주의사항에 주사하면 안 된다고 써 있는 거예요. 세상에 너무 웃기잖아요. 누가 박카스를 주사해? 왜 그러는데? 그러다가 깨닫는 거죠. 아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게 참 많구나. 그런 시간들이 지금의 고현정을 있게 한 게 아닐까 싶어요.

-결국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지만 <선덕여왕>의 미실을 연기한 고현정이 연기대상을 받았다.

@당연한건 아니에요. 처음엔 대상 줄테니까 오라는 식의 방송국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서 참석하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받고 나니깐 나중에 알겠더라고요. 되게 감사한 일이구나, 가길 잘했다, 주실 때 받아야지, 싶었어요.

-한편 최우수연기상을 공동 수상한 김남주의 수상소감이 대상을 받은 고현정보다 더 가슴에 와닿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고현정의 상황은 진심을 담아 시시콜콜 시부모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심플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의 개그로 위장한 그 수상소감이 나로서는 더 짠했던 것 같다.

@전략까진 아니지만 나름대로 기승전결을 갖고 편안하게 수상 소감을 얘기하고 싶었는데 막상 딱 닥치니깐 생각이 많아지면서 갑자기 말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또 너무 제 환경이나 사정 뭐 이런 걸 사람들이 미루어 짐작해서 다 알거라고 믿었던 부분도 있고... 어쨌든 저 역시 김남주씨 태도가 좋아 보이더라고요. 대상도 아니고 최우수 여주상인데 공동 수상이라고 불쾌해하기는 커녕 진심을 기뻐하고 다른 사람들의 수상도 축하해주는 모습 보면서 김남주 씨가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싶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아 이 여자가 이제누구의 아내, 며느리, 뭐 이런 타이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드디어 여배우 고현정으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서게 됐구나 싶어서 정말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 혹시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여인의 초상이라는 영화 봤나? 여성의 자아 찾기를 테마로 한 영화였는데 인상적인 건 마지막장면에서 남편에게 속박된 자아를 자유롭게 할 기회가 왔는데도 결국 그 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는 장면으로 끝난다는 거다.

@아 그러니깐 로라가 되려다 마는군요.

-그렇다 하지만 고현정은 그 문을 열고 나왔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그래요. 뭐 예를 들어 30 정도의 구속이 있었다면 제가 괜히 그걸 한 60이나 80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것 때문에 더 힘든 건 아니었을까 싶고.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면 좀 웃기지만 나와 보니 그 안전한 울타리 안이 어쩌면 더 편했을 수도 있겠다 싶고. 사람들 표현대로 그게 인형의 집이 됐든. 신데렐라 성이 됐든 그곳을 탈출해서 나왔다고 해서 제가 어떤 해방감 속에서 굉장히 편안하고 자유로워진 느낌이냐. 하면 그런 것도 잘 모르겠거든요

-충분히 이해한다. 예컨대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바다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바다는 전혀 다를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당신에게는 작품이 있지 않나? 그러니깐 여배우들의 고현정을 연기 할 수 있는 배우는 이 세상에 단한사람 고현정 밖에 없는 거다.

@그런 여배우들의 다른 여배우들도 마찬가지죠.

-아니다 솔직히 고현정이 아니었다면 <여배우들>은 아무것도 아닌 영화가 될 뻔했다. 뭐랄까, 제일 웃기다, 제일 망가져주니까 스스로 거기까지 내려 갈 수 있을 만큼 내공을 쌓은 지난 시간들을 생각하면 문득 슬퍼지기도 하고.

@저로서는 더 망가질 수 있었는데... (웃음) 사실 영화 보고 나서는 다들 좀 더 막 했어야 했는데 싶었어요. 여배우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극장판 버라이어티인데, 돈을 내고 보기에 다들 너무 예쁘게 나오니까 제가 냉정한 관객 입장에서 보자면 조금 싱거웠을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런 면이 아쉬워요. 좀 더 치열하게 확 들어가줬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 치열함은 <선덕여왕>의 미실로 보여주지 않았나? 예전에 <모래시계>를 같이 했던 김종학 피디는 고현정을 두고 한줄 대사로도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 배우라고 했는데 선덕여왕의 미실을 보니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알겠더라.

@근데 무엇보다 제가 그 미실의 마음을 너무 알겠는 거예요. 사실 전 대본에 씌어진 대로 한 거예요. 그런데 대사들이 점점 회를 거듭할수록 저한테 딱 맞게 잘 주어졌는데 제가 받으면서도 재밌고 알겠더라고요. 무슨 마음인지.

-왠지 미실의 대사 중 이런 게 떠오른다. “살짝 입고리만 올려 그래야 강해 보인다.”

@네. 바로 그런 대사 그 느낌이 너무 확 오는 대사 중 하나였어요. 뭔지 알겠고 제가 그런 순간 많이 경험해봤고 막 울고 싶은 순간에 절대 울면 안 되는 순간이 있었고 정말 웃기는 순간에 절대 웃으면 안 되는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사가 바로 자식인 비담에게 하는 말이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제 상상인데 주고 싶어요. 제 메시지를.. 똑같이 제 아이들에게도.

-하지만 고현정은 미실과는 달리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기도 하고 스스로 더 자유로워지기도 했다. 일종의 깨달음이기도 하고 처세이기도 한 것 같은데 그래야만 한다는 걸 언제부터 알았나?
@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렇게 보면 누구에게나 다 장단점이 있는 게 보여요. 그러다가 자신의 단점이나 약점을 숨기려고 하는 그 순간 굉장히 비참해진다는 걸 알게 된거죠. 그런데 그걸 안 지 좀 오래 됐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막연히 그런 게 아닌가 싶었는데 결정적으로 결혼생활을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너무도 철저하게 깨지니깐.
제가 쭉 그냥 이렇게 배우나 연예인 생활을 계속 했으면 아마 몰았을 것 같아요. 근데 주인공 혹은 핵심에서 벗어나 있는 포지션에서 한 8,9년을 있었더니 오히려 더 많은 게 보이더라고요. 많이 깨져보고 박살이 나보니깐 내가 내 한계를 인정하게 되고..

제가 예로 들었던 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기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다 함께 상호보완해서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걸 시간 낭비 하지 말고 가능한 빨리 뽑아내는 게 가장 좋겠구나 하는 거였죠. 그걸 또 몸소 느낀 게 <선덕여왕> 이라는 작품이었고 또 <여배우들>이란 작품이었던 거고.

-한편 <여배우들>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고현정의 눈물이다. 그 상황에서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이 별로 산뜻해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다소 관습적이기까지 했다.

@아 그건. 우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 해서 우는 것도 있었고 안 우는 것도 있었는데. 전자가 채택이 돼서 영화에 그렇게 나왔던 거예요.

-지극히 나 개인적으로 이혼이란, 결혼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라고 생각하는 주의다. 그래서 그런 식의 눈물바람이 약간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아 그런데, 제 경우 그게 온전히 연기로만 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정말 보수적인 시각이 아직도 많거든요. 그러니깐 제가 배우니깐 멋있다 뭐 얘기하는 분들도 있긴 하지만, 90퍼센트 이상이 아직도 “걔 이론 했잖아”라는 식으로 색안경 끼고 있거든요.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오버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 문제가 있으니까, 아직까지 이혼이 더더욱 치유되지 않는 상처이기도 하겠다.

@재밌는 건 얼마 전에 꿈을 꿨는데, 아이들이랑 만나서 막 노는 거예요. 너무나 재밌게 노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영화 촬영 장소가 되면서, 아역 배우들 역할이 끝났다는 거예요. 그리곤 갑자기 얘네들이 가는 거예요.

저쪽으로... 그 다음 이제 성인이 돼서 소년 소녀 역할 맡은 애들이 오는데 꿈에서 분명히 내 애들이 큰 거예요. 제 기억에 헤어졌을 때 모습만 남아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 자식 같지가 않고 그냥 배우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얘네들이 하는 얘기가 우리는 다 끝났대요. 그러는 거예요. 꿈에서. 그러면서 꿈을 깼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내가 만약 잠실야구장이나 뭐 이런 데 갔다가 아이들과 마주치면 몰라볼 수도 있겠구나.

-왠지 내가 미안해지는 기막힌 얘기다. 본인에게는 비극일 수 있는 얘기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제가 괜히 꿈 얘기를 해가지고... 사실 애들한테 좀 미안한 얘긴데 어떻게 보면 그것도 그렇게 비극적인 일은 아닌 거 같아요. 계속 같이 살면서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힘든 모습 보여주는 것도 아이들에게 분명히 좋지 않을 거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큰아이가 두 살 때 제가 잘못한 일이 있었어요. 내가 힘들다고. 그런데 한 일 년쯤 지나서 제가 잠을 재워주다가 갑자기 그 일이 생각나서, 아이가 이제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혼잣말로, “해찬아, 예전에 엄마가 이러저러해서 너무 미안하다. 잘못했어.” 그랬더니, 아이가 자면서도 ‘괜찮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저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저도 엄마, 아빠한테 사과를 받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어요. 안 하더라고요. 지금도 그게 화가 나요.(웃음) 한편 이런 생각도 하죠. 더 살았으면 계속 미안하다고 해야 할 일이 더 많았겠다.

-분의기 전환을 좀 해야겠다. 지난해 <무릎팍도사> 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 <모래시계>를 뛰어넘는 작품을 하고 싶고, 그걸로 또 뭔가 개인사를 넘어보고도 싶다고. 내가 보기에 <선덕여왕>과 <여배우들> 두 작품으로 바로 그 지점까지 간 게 아닌가 싶었는데, 본인은 어떤가?

@주위에서 그런 얘기 해주시는 분들 많은데, 제 스타일이 뭘 잘 누리지를 못해요. 즐기지를 못해요. 맘껏 아, 2009년에는 내가 그렇게 작품도 좀 했었고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 참 행복하다. 그러면 좋겠는데 괜히 쑥스럽고 민망해지면서 그렇게 즐기지 못하게 돼요. 그리고 이제 정말 마흔이잖아요. 2010년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스스로 성취한,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심리는 어디서부터 왔을까? 혹시 결혼생활 중 자신을 저평가하게 되면서 생긴 심리 같은 거 아닌가 싶은데.

@그게 한 60프로 될 것 같고요. 한 40 정도는 제 가정환경도 있는 거 같아요. 항상 엄하게 채찍질 해주시는 부모님의 영향이 있었으니까.

-어릴 때는 어떤 아이였나? 그때도 지금처럼 좀 남달랐을 것 같은데....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이 키가 중학교 1,2학년 때 키니깐 잘 못 어울렸어요. 맨날 이렇게 혼자 있고. 같은 또래 남자들도 자꾸 남자로 안 보이고, 혼자 상상 많이 하고.... 특별히 특이한 아이는 아니었는데, 혼자 많이 있었던 거 같아요.

-아무래도 혼자 있는 걸 즐기는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네 이제는 너무나 좋기도 해요. 가끔 혼자 이렇게 스르륵 어디 갔다 오는게..

-정신이나 영혼 말인가요? 어디 갔다 온다는 건?

@네 생각이...

-그러기 위해서 가끔 시집을 읽기도 하는 것 같던데.

@네 시 좋아했어요. 시를 읽고 있으면 정말 별별 상상을 다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장석남 시인의 ‘배를 밀며’를 특별히 좋아했던 걸로 안다. 그 시를 읽을 때는 어떤 때였나? 그게 확 와닿았을 때 말이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냐 아님 동지애냐, 막 이런 문제로 고민할 때요.(웃음) 내가 분명히 사랑해서 결혼 했는데 어느 순간 그 사랑을 동지애로 발전시켜야만 두루 편안해지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러다가 조금 지나서는 이성복 시집 읽고는 꽂혀서 이 시인을 좀 만나봐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웃음). “아 괜찮아, 괜찮아.” “아주 써, 써.” 하면서 좋아했어요. 저는 제가 좀 너무 달고 밋밋해서 그런 면들을 스스로 좀 지루했었거든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
-이성복의 시, ‘그 날’중에서..

-한편 고현정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은 지루함이 아니었나 싶다. 지루함으로부터의 도피가 평범한 여학생에서 미스코리아로, 탤런트로, 재벌가 며느리로, 다시 배우로 움직이게 한 것 같더라. 그렇지 않나?

@아, 그랬어요. 아주 지루하더라고요. 여고생이라고 다들 하는 대로 대학 진학하는 게 세상 지루하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머리라도 자르려고 미용실에 갔다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확 저질러버리게 된 거죠. 사실 결혼도 좀 그랬고요.
연예계 활동이 좀 시들하게 느껴질 무렵이었는데 , 그 사람 만나니깐 재밌더라구요. 그런 게 나를 움직인 동력이 된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공평함이나 선악의 문제도 커요. 악에 받치는 일이 있으면 순간 훅 올라오거든요. (웃음)

-그건 일종의 정의감 같은 건가?

@정의감, 뭐 그런 것들도 있어요. 밑도 끝도 없이 미실을 연기할 때도 진짜 막 MBC를 괴롭혔던 것 같아요. 스태프들, 연출부들.... “청소 안 해? 더러워서 못 살겠어. 냄새나서 못 살겠고.” 뭐 이런식으로(웃음) “밥 안 줘? 30프로 넘었네, 그럼 돈을 벌텐데, 미쳤어? 기본적인 건 해줘야지.” 막 이러면서 순간 확 올라오는 것들을 쏟아냈던 것 같아요.

선배들한테 인사 안하는 친구들 있으면, “너 인사 안해? 인사 똑바로 해. 그렇게 건성으로 하려면 차라리 하지 말고.” 뭐 이러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분장실 휴지도 제가 치우고, 막 그랬는데 이제는 신인 애들 자리까지 뺏는 게 아닌가 싶어서 안해요. 이젠 좀 지치고 피곤하기도 하고요.(웃음)

-그럴 땐 완전 여장부다.

@그럴 땐 또 그래야 돼요.

-그런 면에서 여자 대통령 역 어울릴 것 같다. 기대되고. 적어도 고현정이 출연한다면.

@대본을 받으면 잘해야죠. 차질 없이 들어간다고 하면...

-이혼 후 신중하게 선택한 첫 영화가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이었다. 대중이 쌓아올린 고현정의 고상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하나하나 깨부수기에 가장 효과적인 선택이었던 셈인데 한편으로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이후 진저리가 나서는 더 이상 보기 싫었던 홍상수 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건 다름 아닌 고현정이라는 새로운 페르소나였다고.

@재미있는 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아마 홍상수 감독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은 배우는 저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컨대 저는 감독님한테, 나한테 술 먹이지 마라, 술은 회식 자리에서 내가 알아서 먹는다.

대신 연기할 때 원하는 게 있으면 애기를 해라. 나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상한 현학적인 말로 나를 헷갈리게 하지 말아라, 나 그런 말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다 안다. 했어요.(웃음)

-와, 재밌다. 그러니까 <해변의 여인>에서 문숙이 등장하자마자 친 대사, “왜 지랄이야?”는 아마도 고현정 자신에게서 나온 대사였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랬죠. 그걸 잘라버리고 싶어, 뭐 이런 대사까지 다 제가 한거죠. (웃음)

-그럼 이건 어떤가? 1백년 영화 역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바로 문숙이가 한 대사였다. “그래서 지옥이 지루한거야.”

@그것도 제가 한 거죠. 순간순간 지옥이 있잖아요. 특히 지옥 같은 애들 볼때.... 확 태양을 비추어서 그 사람을 들여다보면 다 똑같으니까. 다 까. 뭐 있어? 하는 거죠.

-나는 홍상수감독이 이후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고현정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고현정 배역은 홍상수 영화에서 유일하게 지식인 수컷들을 가지고 놀 수 있을 만큼 성숙하고 자유로운 연자였다. 그 여자가 원하는 ‘무릎 꿇을 수 있는 남자’ 역시 당신에게 나온 말 아닌가?

@그랬어요. 술 마실 때 감독님이 어떤 남자가 좋냐 하시기에, 남들 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남자가 좋다 했죠. 제 엑스가 바로 그런 남자였어요. 재력은 물론 유머까지도.

그 사람 때문에 사물이나 현상을 새롭게 보는 법을 배웠던 것 같아요. 예컨대, 컵이 이렇게 있으면, 저는 늘 이렇게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가 저한테 알려준 게 이걸 돌려서 편한 대로 잡아, 라는 거였으니까.

-재밌다. 사실 고현정과의 대화, 혹은 인터뷰가 흥미로운 건 어디서 읽어봤거나 들어본 얘기가 아니라 진짜 자기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결혼생활 중에 깨달은 게 있어요. 아, 거짓말은 매끄럽게 잘 들리는구나. 알겠는 거 있잖아요. 딱 들었을 때, 그냥 “아, 그렇죠 예, 예~.” 하는 한 점의 의문이 안 생기는 그런 순간이 있는데, 그건 나중에 보니 막이 들어가 있는 거였어요. 그런데 누가 진짜 자기 생각을 얘기하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면서 재밌어지고. 그래서 저도 어느 순간부터 정리는 안 돼 있지만, 제 생각을 얘기해야 된다, 라는 걸 알게 된 거지요.

-결혼 전에도 자기 생각을 좀 거침없이 얘기하는 타입이었나?

@전혀 아니었어요. 그땐 굉장히 수동적인 애였죠. 굳이 내 주장을 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굉장히 안정감 있는, 사고 안치고 들쑥날쑥도 없고 남들이 봤을 때 그냥 아주 수동적이고 조신하게 가는 아이였어요. 지금은 좀 불안불안하죠.(웃음)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여배우들>, 두 영화에 똑같이 나오는 대사가 있다. “니들이 날 알아?” 고현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제가 제일 저를 잘 알죠. 누구더라, 아마 이창동 감독님이 하신 얘기였던 것 같은데, 내가 얼마나 후지고 얼마나 개 같은
면을 갖고 있는지는 하늘만 안다. 그건 부모도 모르고 내 형제나 내 남편이 아는 것도 아니고 오직 저만 아는 것 같아요. 저라는 인간에 대해선..

-여담이지만 이창동 감독하고는 작업 안하나?

@그분이 하자고 안 하대요.(웃음) 전 컴백하자마자 그분이랑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창동 감독님 영화를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기다리고 있죠. 아직 작업 해 보지 못한 다른 모든 감독들과 함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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