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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Entertainer

경향신문 091230 고현정 인터뷰

by :선율 2019. 8. 29.

입력 2009.12.30 00:08수정 2009.12.30 10:20

ㆍ올 안방극장 화제의 캐릭터 1위 ‘선덕여왕’ 미실 역 고현정

비 내리는 크리스마스 오후, 서울 방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고현정은 막 전장에서 돌아온 장수 같았다. 대승을 거뒀으되, 길고 치열한 상흔 역시 안은 표정에선 피로감과 자부심이 함께 묻어났다. 방송에서 본인의 입으로 고백했듯 ‘연기력보다 결혼과 이혼으로 더 유명했던’ 그는 최근 막을 내린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 역을 맡아 우리나라 사극 사상 가장 독창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올해 가장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 배우’ ‘안방극장을 사로잡은 화제의 캐릭터 1위’ 등으로 선정되며 2009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지만 정작 그의 몸은 전쟁터다. 촬영기간 내내 10㎏ 무게의 가체를 머리에 얹고 촬영하느라 어깨와 목의 핏줄이 부어 병원에 다니고 빈혈과 두통약을 상복한다. 까다롭다고 알려진 이 톱스타는 삶에 도가 튼 할머니 같은 표현력을 구사하며, 때론 지면에 그대로 옮기기 어려울 만큼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는 그동안 고현정을 너무 몰랐다.

- ‘미실’은 연기 경력에서뿐 아니라 실제 인생에서도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된 것 같습니다.

“드라마건 인생이건 주연과 조연이 따로 없다는 걸 알았죠. 또 그동안 몸만 늙어왔는데 이 작품을 하며 정신도 조금 성장한 것 같고요. <히트>란 작품을 함께 한 작가 김영현씨가 ‘주인공은 아니나 몹시 애착이 가는 역할’이라기에 응했지만 결정한 후에 더 고민했어요. 주인공은 작가·PD·다른 배역들이 다 보호해 주지만 조연은 혼자 알아서 해야 하니까요. 조연도 처음이고 사극도 처음이라 막막했습니다. 미실이 겉으론 강해도 많이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고 여왕을 꿈꾸지만 성골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을 삭이며 산 사람이란 걸 이해하면서 미실의 캐릭터를 찾았어요. 대본을 읽으며 가슴에 훅하는 기운이 느껴지는 대사가 있을 땐 그 느낌을 유지하려 했고, 주위에 호령하며 쾌감을 느끼기도 했죠. 숨 죽여 살아온 세월이 길어선지 미실처럼 마구 큰소리를 치고 싶었나 봐요.”

- 미묘하게 움직이는 눈썹, 상황에 따라 다른 각도로 올라가는 입꼬리가 화제였습니다. 연습 덕분인가요, 역할에 몰입되어 빙의된 듯 저절로 표현되는 건가요.

“가체 덕분이에요.(웃음) 아이 몸무게만한 가체가 너무 무겁고 힘들어 선 굵은 동작은커녕 너무 힘들어 절로 눈썹이 올라갔어요. 사극에선 얼굴의 각이 매우 중요하고 캐릭터를 나타내 주기에 표정 연기에 신경쓰고 대사의 톤도 여러 가지로 연습을 했죠. 제 연기가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제가 ‘사태 파악’을 잘했기 때문일 거예요. 무엇보다 극의 전체 흐름을 파악해서 이 장면에서 절정기의 폭발력을 보일지, 혹은 일단 숨을 고른 뒤 다음 장면에서 극에 달한 표현을 할지 판단하는 게 중요해요. 제가 열 개의 장면에 나온다면 그중 한 장면만 성공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아홉 개는 다른 이들에게 줘야죠. 모든 장면에서 혼자 완벽해도 지루하거든요. 그저 자기 연기만 욕심 내면 시청자들의 ‘구경거리’에 그치지만 상대역의 표정도 살피고 스태프의 기분도 배려해야 좋은 연기자죠. 전 함께 일한 스태프들의 이름을 다 외고 촬영장에 가면 동료들의 안색도 살피고 상대역의 대사 톤도 지적해줘요. 그래야 극의 흐름도 자연스럽고 시청자들이 몰입할 수 있으니까요.”

- 그런데 왜 작업 중 가장 까다로운 연기자라는 지적을 받았습니까.

“촬영 현장에서 제가 악역을 자처했거든요. 저를 비롯한 연기자들이 화장실도 없는 산 속에서 새벽 4~5시에 집합해서도 마냥 기다리거나 며칠 밤을 꼬박 새우는 강행군을 했어요. 세트장이 더럽고 식사가 부실하고 같은 장면을 하염없이 반복해서 촬영하는데도 (덕만 역의) 이요원씨를 비롯한 동료들은 워낙 착해 아무 불평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진짜 미실처럼 굴었죠. 가뜩이나 무거운 가체나 옷 때문에 짜증난 상태라 ‘이렇게 (세트장이) 더러운데 우리가 신종플루 걸려 죽으면 좋겠냐’ ‘야식은 따끈한 국물의 국수를 달라’ 등등 잔소리를 한 덕분에 다들 긴장해서 NG나 촬영시간도 줄었어요. 막판엔 완전히 욕쟁이 할머니가 되더군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욱하는 제 성격 때문에 동료들에게 이용당한 것 아닌가 싶어요.(웃음)”


- 이혼 뒤에 비로소 실력파 연기자로 평가를 받는데요. 시련이 약이 된 걸까요.

“연기론을 펼칠 주제는 아니지만 배우는 ‘깨지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하고 쓰러져 다시 일어나려고 감정을 추스르는 경험을 하고 그걸 기억해둬야 절절한 연기가 나옵니다. 전 결혼생활을 통해 속된 말로 많이 깨졌어요. 제가 생각하는 제 자신과 남들이 판단하는 제 자신이 다를 수 있다는 것, 제 안의 속물근성이나 혹은 자존심 등 제 실체를 철저히 검증하는 시간을 보냈기에 이젠 제 약점까지도 드러내고 사랑하는 법도 알게 된 것 같아요. 흔히 배우가 철저히 배역을 연구해 그 인물과 심리적으로 하나가 되는 연기를 ‘메소드 연기’라고 하는데 머리로 연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제가 푼수처럼 망가진 모습을 보여준 <여우야 뭐하니>부터 연기가 자연스러워졌다는 평을 들었는데, 그때부터 제 안에서 저를 찾는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아픔을 겪으며 제 안의 자기방어 기제를 모두 걷어낸 덕분이지요.”

- 재벌가로 시집가서 ‘신데렐라’란 말을 듣기도 했는데 그 결혼이나 이혼을 후회합니까.

“아뇨. 제가 선택한 일이고 얻은 게 더 많아요. 남편은 로맨틱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었고 결혼생활을 하며 제가 몰랐던 문화예술에 눈을 떴어요. 만약 결혼하지 않고 쭉 연기생활을 지속했다면 지금 진부하고 시시한 연기자로 머물렀을 거예요. 결혼을 통해 제가 얻은 교훈이라면 결혼은 성인남녀들끼리 해야 한다는 거죠. 각자 정신적·경제적으로 독립되지 않은 이들이라면 나이 들었다고 혹은 집안배경만 믿고 결혼해선 안돼요. 스스로의 인생에 책임질 자신이 있을 때 결혼해야 건강하고 성숙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죠. 전 바른 가정교육을 받고 성장했고 나름 톱스타였지만 시댁의 문화적 차이에 적응하기 힘든 점은 있었어요. 후회가 없다는 건 저로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서지요. 처녀 시절 친구도 만나지 않았고, 손님 초대해 요리할 때 손가락을 베었는지도 모르고 접시를 나를 만큼 긴장하고 살았죠. 아이들에게도 제가 줄 수 있는 사랑을 다 줬어요.”

- 대중의 주목을 받는 삶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영악하고 매사에 굉장히 전략적인 사람으로 묘사되는 건 좀 억울합니다. 전 뚜렷한 목적을 갖고 매진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제 키가 172㎝인데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이 키였어요. 키가 크니까 주변에서 미스코리아 나가보라고 해 출전했고,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재벌가 자제였고 이혼 후에도 마냥 쉴 수 없으니 연예계에 복귀한 것뿐이에요. ‘무수가 상수’라고 생각하며 사는데 미실 같은 지략가로 보니 속상하죠. 물론 저도 제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진 못했던 것 같아요. 전 늘 실력으로 승부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껏 이미지를 팔아온 면이 있죠. 미스코리아로 시작해 <모래시계> 여주인공, 재벌가와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컴백해서도 연기력보다는 피부가 더 화제가 됐으니까요.”

- 촬영현장에도 경호원들을 대동하는 등 보호막을 쳐서 다가가기 힘들다는 평이 있습니다.

“다소 과장된 면도 있지만 맞아요. 이혼 후 연예계에 복귀할 땐 매스컴의 관심이 너무 뜨거워 저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스타로서 제가 당당히 요구하거나 거부할 권리도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잘 안하는 것도, 사실은 누군가 저를 보호해주지 않으면 제 성격상 아무 말이나 해서 이미지도 무너뜨리고 사고(?)칠까 두려워서 그래요.(웃음).”

- 재혼 계획은 없나요. 천정명씨나 조인성씨와의 스캔들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화 <여배우들>에 나오는 제 대사처럼 지금은 남편보다 저를 보필해줄 아내가 필요한 상태예요. 후배들과의 스캔들도 전혀 근거없는 소문은 아니죠. 작품을 함께 하면서 친숙해졌고 같은 업계에서 일하니 공감대도 크고 대화도 통하는 괜찮은 후배들이에요. 투정도 들어주고 조언도 해주니까 저를 편하게 생각하나봐요. 가끔 저희 집에 모여서 밥 먹고 와인도 마시다 새벽 2~3시에 헤어지는데 그 친구들이 그 시간에 제 집에서 나가니 오해를 살 만하죠. 하지만 9~10살 연하인 좋은 후배들일 뿐이에요.”

-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나요.

“전 애국가만 들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애국심이 커요. 만약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한다면 유관순처럼 나서서 독립만세를 부를 타입은 아니지만 논개처럼 ‘저 자를 내가 해치우리라’란 마음으로 적장을 끌어안고 죽을 각오는 되어 있어요. 성향을 굳이 따지자면 보수는 아닌 것 같고요. 올 들어 부쩍 의미있고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저기 조용히 후원은 하는데 이젠 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체계적으로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여배우들끼리 힘을 합해 문화행사를 하는 것도 좋겠다, 재능 있지만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자 등등 머리 속에서 여러가지 기획이 떠올라요.”

- 곧 마흔입니다. 여배우로서 나이든다는 게 두렵진 않습니까.

“어릴 때 엄마 친구분들이 모여 ‘아무개가 마흔살이야’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속으로 ‘아, 곧 돌아가실 나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제가 마흔살이 된다니…. 지금 팽팽해 보이는 얼굴은 사실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았고, 피부는 하도 남들이 제 피부 좋다고 관심이 많기에 요즘 신경써서 피부과에 다녀요. 하지만 나이 드는 건 두렵지 않아요. 어서 마흔다섯살이나 쉰살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무렵이면 제가 훨씬 근사해지고 삶의 질도 나아질 것 같아요. 여성성도 줄어들고 타인의 시선도 덜 의식하면서 제 삶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흔살에 만개해서 마흔다섯살 이후엔 제게서 산림욕 향기가 났으면 좋겠어요.”

-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아들 비담을 알아보는 장면 등에서 어머니로서의 아픔이 전해졌습니다.

“이혼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어미로서 아이들을 돌보지 못한다는 자책감은 커요. 시댁에서 완벽하고 훌륭하게 키워주기 때문에 지금 저를 만나는 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안 만나고 있어요. 오늘 같은 크리스마스나 두 아이 생일이 있는 5월이 제겐 참 잔인한 때입니다. 제가 지금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엄마의 모습이 자랑스럽게 각인되길 바라서예요. 이 다음에 아이들이 커서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으로 엄마를 찾을 때, 인생 전체를 흔들어놓지 않을 만큼 앞뒤가 맞는 상태, 아주 산뜻한 모습으로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전 앞으로도 건강하게, 열심히 일해야 해요. 다음 작품에선 여자 대통령을 맡을 예정인데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미실도 힘들었는데 대통령이라니요….”

▶ 고현정은 누구인가

1971년생. 89년 미스코리아 선에 당선된 뒤 연예계에 데뷔해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와 <엄마의 바다> 등에 출연했다. <모래시계>의 여주인공 윤혜린 역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95년 신세계그룹 부회장 정용진씨와 결혼해 화제가 됐고, 2003년의 이혼도 그 못지 않게 관심을 모았다.

2005년 드라마 <봄날>로 복귀해 영화 <해변의 여인> <여배우들>로 영역을 넓혔다. 올해 <선덕여왕>의 미실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줬다.

후배들에겐 ‘의리있고 두목 기질 있는 선배’로 불린다. 마흔을 앞두고도 모공이 보이지 않는 투명한 피부로 뭇 여성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차기작 <대물>에선 여성 대통령으로 등장할 예정.

지금은 미실로 산 시간의 후유증이 커서 건강을 다지는 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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