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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계 거성 코가 마사오•미소라 히바리

by :선율 2024. 1. 18.

한국가수의 일본진출을 조사하면서 엔카의 원류는 한국이라든가, 엔카의 아버지 작곡가 코가 마사오와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교포설 과연 사실일까.

둘 다 일제강점기 출생이라 언어구사력으로는 네이티브를 가릴 순 없었다.



엔카의 아버지 작곡가 코가 마사오


코가 마사오는 1904년생으로 후쿠오카 출생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인천에 살다가 서울로 옮겨 초중고를 한국에서 나왔다는데 그 때가 1910년이다. 국권피탈되었지만 일본인이 본격적 이주가 하기 전이다. 연고도 없는 과부가 30넘어 애데리고 갑자기 해외로 생활기반 옮기기가 쉽나? 자기 본가가 한국에 있으면 몰라도. 후쿠오카에서 부산이 제일 가깝고 그시절에 비행기도 없고 배로 이동시간도 긴 인천으로 갔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사는 구역과 한국인이 사는 구역이 아예 따로 있어서 한창 식민지 시절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인이 한국어를 몰라도 생활 가능했을 정도(근현대사 사료 읽어보면 해방 후 왜 평생을 나고자란 한국을 떠나야하는지 이해를 못했다고함)였는데, 선린교보(현 선린인터넷고)를 나온데다 한국 음악계 인맥도 일본에서도 만나고 했던거 보면 한국계가 맞아보임. 특히 표절사건을 보면 한국의 영향 안받고는 나올 수 없다.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


미소라 히바리(37년생)는 내가 상상했던 이미자나 김연자 같은 창법이 아니라 [박향림-오빠는 풍각쟁이(1938)]가 바로 떠오를정도로 같은 간드러진 목소리였다.

그러나 1910~1945까지는 일제강점기로 일본 가요나 민요의 영향을 받았거나 아예 같은 노래를 듣고 자랐을 수도 있어서 그 이전 메이지시대(1968~1912) 일본노래를 찾아 들어봤는데 악기사운드는 그시절 사운드니 악기가 비슷한건 논외로 하고 창법이나 구성으로 보면 엔카는 일본민요 보다 트롯에 가까웠다. 1916년생으로 현재까지 불리고 있는 [목포의 눈물(1935)], [목포는 항구다(1942)]의 원곡자 이난영의 곡스타일이나 창법을 들어보면 미소라 히바리 보다 이전 시대인데 유사하다. 미소라 히바리는 1949년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선 아버지가 재일교포라는 설이 있긴한데 구체적인 내용은 없고, 한국에선 김해 출신 아버지와 어머니 키미에는 일본인이라는 설이 있다. 일본에 공식적으로는 도치키 출신 아버지에 도쿄 출신 어머니로 돼있다. 다른것 보다도 본명 성씨인 카토우가 재일교포들도 많이 쓰는 성씨라는 점과 생선가게를 했다는 점이다. 키타노 타케시가 감독한 [피와뼈]를 보면 생선조업을 하는 작은 공장을 배경으로 재일교포 1세들의 생활상과 애환을 그린 작품이다. 실제인물을 토대로 일제강점기 여성비행기조종사를 다룬 장진영 주연의 [청연]에서도 주인공 지인(한지민)이 생선시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나온다.


재일교포의 삶을 다룬 [피와뼈]의 원작 소설가는 36년생 양석일, 1950년대 오사카 배경
영화 [청연] - 미소라 히바리는 카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출신
영화 [청연]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일본이며, 주인공이 극중 생선일하는 지인을 찾아 요코하마에 오는 장면



북한의 김정은 모친 고용희가 미소라 히바리 박물관에 방문한 사실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고용희(1952년생)는 9살때 북송된 오사카 츠루하시 출신 재일교포 영부인이다. 오사카 그중에서도 츠루하시는 재일교포 주거지로 유명한데 일본 연예계 거물 가수 와다 아키코(1950년생)는 츠루하시 출신 재일교포 연예인으로 소꿉친구설이 있다. 와다 아키코는 미소라 히바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친한사이라 밝힌 적이 있다.
한편 미소라 히바리의 동생은 조직(폭력배)에 있어서 해당 건으로 홍백가합전(연말 가요축제방송)에 출연을 못한 적이 있었다. 참고로 재일교포는 대학진학을 못하게 조선인이 세운 학교를 정식교육기관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등 출세길 발목잡아서 파친코, 연예계, 야쿠자로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재일교포의 진로 고민은 소설 및 영화 [Go]에서도 잘드러난다. 국립대의 경우 재일교포 한국국적자가 90년대 첫입학했을 정도로 박해했다.
또한 [아리랑]을 불렀다.
일제강점기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은 첫 조선의 흥행영화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민요 아리랑이 전국구로 흥했고 일본에서도 [아리랑], [도라지]를 여러가수가 음반으로 출시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미소라 히바리 다큐를 보면 미군부대에서 노래부르다 데뷔하는 코스를 거쳤는데 패티김, 인순이와 같은 루트라는게 신기하다.



요시야 쥰(길옥윤)과 패티김


패티김은 38년생으로 37년생 히바리와 또래다. 패티김의 전남편 길옥윤(예명, 일본명 요시야 쥰)과 1958년 일본 연예계에서 만났다. 요시야 쥰이라는 이름으로 가수•연주가•작곡가인 오자와 히데오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그의 권유로 타바타 요시오(가수,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 가수) 악단에서도 일했다. 패티김이 유명해서 길옥윤의 정체도 세상에 드러난거지. 특히 일본어 교육 받은 세대라 언어적으로는 구분 할 수 없다.


https://youtu.be/meK1gR2diTU?si=6YehQSI7aj2NpZT7

미소라 히바리 다큐멘터리


https://youtu.be/X1cSS75wsxA?si=kFyJt8mNbpRW68gw



https://pinkiss.tistory.com/688

아리랑,도라지 - 한류 1호곡

한국 최초의 영화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당시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아리랑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나운규가 창작한 부분이며, 도라지는 느린곡을 빠르게 편곡하여 신민요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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